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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의 강력한 서술 능력

「이야기」가 있는 도상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다양한 매체 상에 출현합니다. 어떤 것들은 본래 「이야기」를 위해서 제공되는 도상이었습니다. 그 예로, 묘실과 사당 안의 충효나 절개와 의리를 주제로 한 석각화, 돈황 벽화 속에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그린 그림,《화엄경(法華經)》의 속표지에 있는 불경 이야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야기」가 아닌 도상도 있는데 예를 들면 《효경(孝經)》이나 《시경(詩經)》등 사상 혹은 고전 문학에 첨부된 그림은 도상 자체의 강력한 서술성으로 인하여 관중에게 글을 뛰어넘는 이야기의 느낌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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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무씨(武氏)사당 화상석 탁본
    한 무씨(武氏)사당 화상석 탁본_預覽圖
    한 무씨(武氏)사당 화상석 탁본
    • 종이에 탁본 가로로 긴 두루마리
    • 그림크기 세로115.2 가로 139.2 cm
    • 구탁(購拓)000037-3

    기원 151년의 무량사에는 얼핏 보기에는 사물의 윤곽만 있는 것 같은 석각으로 선을 그어 그려 장식한 전체 공간이 있습니다. 이번에 전시하는 것은 서쪽벽의 탁본으로 중간의 두 개의 층에는 「노래자(老萊子)가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다」와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다」등의 7가지 충효와 절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가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인물들의 앞뒤 관계를 통해, 그리고 곁에 적힌 설명문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여 관람자가 이야기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많은 인물들의 극적인 동작이 여전히 세부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번째 층 왼쪽의「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다」부분은 형가( ?–기원전 227)의 다섯 손가락의 모습이나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기원전210)의 호위병이 어떻게 그를 안고 가로막는지 모두 얇은 선으로 이야기를 넘어서 세부적인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_預覽圖
    민국시기 장대천(張大千)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28굴의 모사본(북위 수달나(須達拏) 태자의 본생 이야기)
    • 비단에 채색 두루마리
    • 그림크기 세로65.5 가로1105 cm
    • 증화(贈畫)000031

    이것은 장대천이 6세기의 돈황 벽화를 모사한 작품입니다. 벽화는 원래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순서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을 표현하였습니다. 각각의 내용 사이는 바위나 건축으로 나누었는데 인물의 모습이 활달하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장대천은 벽화 원본의 구도를 참고하여 전체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용을 배치하여 일반 두루마리 그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 방향과 다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수달나태자의 본생(本生) 이야기에서 「하얀 코끼리를 보시하는」부분이 전시됩니다. 적국에서 고의로 8명의 바라문(婆羅門)을 파견하여자비롭게 베푸는 수달나에게 백전백승을 상징하는 국보인 하얀 코끼리를 요구합니다. 태자는 보시를 허락하여 그들에게 코끼리를 타고 떠나도록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은 오히려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_預覽圖
    후진(後秦) 구마라십(鳩摩羅什) 번역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종이 절첩식
    • 원라라때 다시 간행된 소식(蘇軾)의 글씨체로 된 필사본
    • 각 반쪽 페이지의 테두리 세로 31.9 가로15.7cm
    • 고불(故佛)000201, 고불(故佛)000207
    • 중요유물

    이 두 폭의 판화는《법화경(法華經)》제1권과 제7권의 책의 서두에 삽입된 삽화입니다. 화면의 오른쪽에 석가모니불과 협시와 따르는 무리들의 몸체가 비교적 큰데 전통 회화에서 중요한 인물을 부각시키는 관례입니다. 초기의 돈황 벽화에서 바위로 서로 다른 이야기나 줄거리를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삽화의 화가는 이야기를 같은 산수화 장면 속에 함께 두고 지형과 땅의 생김새를 이용하여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출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삽화는 석가모니불이 《법화경》과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성공적으로 묘사하였으며 화면이 조화롭고 전체적인 통일감을 갖추고 있습니다.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_預覽圖
    송 고종(高宗)이 효경(孝經)을 쓰고 마화지(馬和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사군장(事君章)
    • 비단에 채색 화첩
    • 그림크기 세로28.8 가로33.7cm, 세로29.1 가로36.2cm
    • 고화(故畫)001224-1, 고화(故畫)001224-15
    • 중요유물

    《효경》은 공자가 효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에서 공자는 제자들에 둘러싸여 평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있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증자(曾子)가 있는데 마치 불교의 책의 서두에 삽입된 삽화처럼 설교를 하는 장면을 반대로 간략하게 만든 유가의 버전처럼 보입니다.

    제 15장의<사군 (事君)>은 그림 속에 군왕은 궁궐 안에 있고 신하들이 있는 정원과는 버드나무 한 그루의 거리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가까울 수가 없었으며 이 둘이 그림 속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비슷한데 화가가 글 중의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허물을 반성한다」라는 구절을 그림으로 해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화첩은 남송 화원화가 마화지(1127-1290사이에 활동)의 양식과 달라 아마도 송대 사람에 의해 그의 이름을 빌려 제작된 작품일 것입니다.

    • 청 홍력(弘曆)이 칙명을 내려 편찬한 어필시경도(御筆詩經圖) (제풍(齊風)에 수록된 보전(甫田), 빈풍(豳風)에 수록된 칠월)
    • 청 홍력(弘曆)이 칙명을 내려 편찬한 어필시경도(御筆詩經圖) (제풍(齊風)에 수록된 보전(甫田), 빈풍(豳風)에 수록된 칠월)
    청 홍력(弘曆)이 칙명을 내려 편찬한 어필시경도(御筆詩經圖) (제풍(齊風)에 수록된 보전(甫田), 빈풍(豳風)에 수록된 칠월)_預覽圖
    청 홍력(弘曆)이 칙명을 내려 편찬한 어필시경도(御筆詩經圖) (제풍(齊風)에 수록된 보전(甫田), 빈풍(豳風)에 수록된 칠월)
    • 종이 화첩 장황
    • 청 건륭연간 그려진 필사본
    • 판면의 테두리 가로30.9 세로39.7cm
    • 고전(故殿)019742, 고전(故殿)030553
    • 중요유물

    《시경(詩經)》은 가장 오래된 시가의 모음으로 서주부터 춘추시대 중엽까지의 시가 300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내용들이 사물을 빌려 뜻을 표현하고 미묘하고 은근하게 숨겨진 의견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송의 문관인 마화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그가《시경》에 맞춰 그린 그림은 명작이 되었습니다. 청대 건륭황제는 궁정화가들에게 궁중에 소장된 마화지의 《시경도》를 모사하게 하고 손실된 부분을 보충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것은 건륭황제 때 모사한 작품 중 두 장의 그림입니다.

    〈보전〉의 원망하는 것과 같은 시구절은 그리움과 만남에 대한 기대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시구 중의 그리움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요? 그림 속의 비스듬히 아래로 향하는 산기슭은 수많은 산과 물을 암시하며 밭 옆에 있는 문사가 먼 곳에 있는 친구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야기 그림의 방식으로 절묘하게 시 속의 서정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칠월〉은 길이가 매우 긴데 농민들이 일년 동안 해야 하는 주요한 일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작고 네모난 화첩 안에 내용을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요? 화가는 과감하게 구름과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화면을 세 개로 나누고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밤에 별자리를 보는 것, 뽕나무 농사와 채집, 연말 연회 모임의 장면을 묘사하였습니다. 연회 모임 장면에서 이 그림이 글의 내용을 그래도 따라서 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는 칠월의 글 중에 언급되지 않은 음악과 춤 장면을 분명하게 좌측 아래쪽에 배치하였는데 예와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는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_預覽圖
    명 주견유(朱見濡)가 칙명으로 편찬 어제신집단이정수(御製新集斷易精粹)
    • 종이 화첩
    • 명 성화(成化) 연간 내부(內府)에서 채색으로 그린 판본
    • 판면의 테두리 세로14.6 가로17.2cm
    • 고선(故善)002842, 고선(故善)002851, 고선(故善)002866, 고선(故善)002838, 고선(故善)002841
    • 중요유물

    《어제신집단이정수》는 성화18년(1482)에 편찬된 현재 55책만이 남아있는 점술서로 1000편 이상의 점술과 관련된 시와 그림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도상은 시구의 예를 직역한 것이 매우 많은데 여를 들면 「용에 매달리고 봉황에 의지하다」이라는 구절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용의 꼬리에 타고 올라가거나 봉황을 쓰다듬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또한 간접적으로 번역하는 방식도 있는데 예를 들면 「다시금 인묘(寅卯)의 땅을 만난다」*는 호랑이와 토끼가 지면을 걷는 모습을 그린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십이간지(十二干支)의 동물로 변환한 방식입니다.

    비록 시의 구절이 명확하지 않지만 화가의 해석을 통해서 희극적인 긴장감이 있는 화면을 창조해 내었는데 사람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주: "인(寅)"과 "묘(卯)"는 각각 호랑이와 토끼에 해당하므로,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해당 동물들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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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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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_預覽圖
    송 사방득(榭枋得)이 주석을 함 명나라 주석이 추가된 천 개의 시 선집
    • 종이 포배장(包背裝)
    • 명 내부(內府) 붉은 색 칸을 긋고 채색으로 그린 필사본
    • 판면의 테두리 세로26 가로17.2cm
    • 평도(平圖)009591

    이 책은 보기 드문 것으로 명나라 궁정에서 정성을 들여 제작한 어린이 교육용 책입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를 골라서 수록했을 뿐만 아니라 해석과 시를 추가한 것 외에도, 궁정 화가들이 시구절에 따라 채색 그림을 덧붙였습니다.

    시구절은 작가의 생각에 따라 흘러가 앞과 뒤 구절이 연상하는 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는데 화가는 어떻게 대응을 했을까요? 이 번에 전시된 왼쪽과 오른쪽 그림은 모두 두 개의 시가 합성된 그림입니다. 화가가 「다른 시를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 傳 宋 李嵩 瑞應圖
    송  이숭(李嵩) 상서로운 징조를 묘사한 그림
    송 이숭(李嵩) 상서로운 징조를 묘사한 그림
    • 비단에 채색 두루마리
    • 그림크기 제1단 세로32.6 가로96.5cm
    •        제2단 세로32.6 가로106.5cm
    •        제3단 세로32.6 가로65.5cm
    •        제4단 세로32.6 가로130cm
    • 고화(故畫)001472

    이야기 그림은 역사적 사건 그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림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관련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진실이 있는 것일까요?

    이숭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상서로운 징조를 묘사한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생각할수록 흥미롭고 의미를 새기게 하는 도상입니다. 남송 초에 고종(高宗,1107-1187)의 통치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대신들은 즉위하기 전의 상서로운 징조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고 궁정 화가는 이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꿈속에서 도포를 벗다」라는 단락에 그려진 것은 단순히 군대 진영에서 깊이 잠든 고종이 아니라 흠종(欽宗, 1100-1156)이 옷을 벗어 그에게 전해주는 그의 머리 속의 꿈을 그렸는데 마치 구름이나 연기처럼 떠오르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야기소개-꿈속에서 도포를 벗다(만화 첨부)

    정강 원년(1126) 송 흠종(欽宗)은 동생 조구(趙構)를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후 금나라 군대가 남으로 내려오면서 북송이 멸망하고 송 휘종(徽宗)과 흠종은 금나라 사람들에 의해 잡혀 북방으로 가게 되었고 조구는 남경에서 즉위를 하여 남송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도포를 벗는다는 이야기는 이 정권 교체 시기에 발생한 것입니다. 조구가 최고 지휘관이 되어 여러 곳에서 전쟁에 참가하던 어느 날 자신과 형인 흠종을 궁궐 정원에 만나 흠종이 자신의 도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주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이는 정권과 왕위를 그에게 전해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조구가 이를 거절하려고 할 때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대신인 조훈(曹勛)은 이 일을 듣고 글을 지어 조구가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천명을 품어 국가를 다시 흥성하게 할 것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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