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의 강화와 개조
거마란팅청(噶瑪蘭廳城)의 신설은 통치 세력의 확장을 반영합니다. 장화(彰化), 펑산(鳳山), 단수이(淡水, 주쳰(竹塹)) 등의 현(縣)과 청(廳) 또한 지역 주민들의 기부와 지원을 바탕으로 19세기 전반에 성 재건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기존의 대나무와 흙으로 만든 임시 성곽은 점차 벽돌 성곽으로 대체되었으며, 견고한 성벽은 청대 타이완 통치의 중요한 분기점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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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府城) 소서문(小西門)의 부서진 기와 조각
청대
현재의 타이난시(臺南市)에 위치한 타이완푸청(臺灣府城)은 오랜 기간 동안 청대 타이완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습니다. 타이완푸청은 옹정(雍正) 3년(1725년)에 창건된 후 여러 차례 개축을 거쳐 도광(道光) 연간에 이르러 주요 성문 8개가 세워졌습니다. 고궁박물원은 1970년 국립 청궁(成功) 대학 뤄윈핑(羅雲平) 교장으로부터, 타이완푸청 소서문(小西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서진 기와 조각 몇 점을 기증받았습니다. 이 기와들은 볼록한 면의 정중앙에 ‘성와(城瓦)’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잔존 구조물들은 본원이 소장하고 있는 성곽 건설 관련 문헌과 상호 참조할 만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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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성곽의 흙으로 된 성벽 건축 상황에 대한 추산 상소문
복강안(福康安), 덕성(德成), 서사증(徐嗣曾)
건륭(乾隆) 53년 4월 11일장군 복강안의 상소에 따라, 건륭 황제는 공부(工部) 좌시랑(左侍郎) 덕성(德成)과 복건순무(福建巡撫) 서사증(徐嗣曾)에게 타이완 성곽 개축 문제를 공동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타이완의 주요 거점인 푸청(府城)의 강화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고, 주뤄청(諸羅城)은 전란 중에 용감히 적을 막아낸 공로로 쟈이(嘉義)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동시에 개축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산은 여전히 가장 큰 도전 과제였습니다. 민성(閩省) 관리와 공부가 세밀하게 계산한 결과, 결국 벽돌이나 돌로 된 성곽이 아닌 세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토성(土城)을 축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건륭 황제는 이를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비준하였습니다: “논의한 대로 시행하라.” -
타이완푸(臺灣府) 거마란팅(噶瑪蘭廳) 지리지
진숙균(陳淑均) 총괄편찬, 살염(薩廉) 편집
청 함풍(咸豐) 2년 간행본거마란팅청(噶瑪蘭廳城)은 현재의 이란시(宜蘭市) 내에 위치하며, 19세기 대만에서 가장 먼저 신축된 성입니다. 가경(嘉慶) 17년(1812년)에 거마란팅(噶瑪蘭廳)이 공식적으로 설치되기 이전부터 성곽 축조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담당한 대만지부(臺灣知府) 양정리(楊廷理)는 우웨이(五圍)에 대나무를 심어 성을 만들고, 주위를 구궁(九芎) 나무로 둘렀습니다. 이로 인해 이 성은 ‘구궁성(九芎城)’ 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식으로 청이 설치된 이후, 관청에서는 가시 대나무를 추가로 심고, 성을 보호하는 해자를 파며, 성곽의 네 성문에 도개교를 설치하고 성루(城樓)를 증축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마침내 규모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는 ‘후산(後山)’ 지역에 대한 통치가 점차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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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산셴(鳳山縣) 성곽 건축 및 수리에 관여한 관민의 기부자 명단 및 금액 내역
파직 후 유임된 복건순무(福建巡撫) 한극균(韓克均)
도광(道光) 7년 2월 29일19세기에 또 다른 성곽 축조의 원동력은 지방 관리와 민간의 유력인사들과 상인들의 자발적인 추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변란을 방지하고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에서는 더 견고한 성곽을 강하게 희망했으나, 예산은 여전히 큰 문제였습니다. 도광(道光) 연간에 이르러, 민성(閩省) 고위 관리들의 상소와 지방 재원의 협력 모델을 통해, 장화(彰化), 단수이(淡水, 주쳰(竹塹)), 펑산(鳳山) 등의 성이 잇따라 벽돌과 돌로 된 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이제 펑산청(鳳山城) 개축에 관한 이 상주문을 함께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관료와 지방의 유력인사들의 긴 기부 명단에서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