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고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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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무도설(佾舞圖說)
『중수대군각건축도설(重修臺郡各建築圖說)』 36에 수록
청 건륭 연간(1736–1795)
平圖021005‘일무(佾舞)’는 제단과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의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때마다 바쳐지는 춤으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뉘며, 또한 팔일(八佾)과 육일(六佾)의 구분이 있습니다. 『대청회전(大清會典)』(권58)에 따르면 문묘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사용하며, 초헌부터 종헌까지 모두 문무(文舞)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공자를 제사하는 대례에서의 일무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일무를 추는 사람들은 왼손에 약(籥),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있습니다. 「도설(圖說)」에서는 “약과 적의 자세에는 열 가지가 있다”고 설명하며 또한 “문묘에서의 일무는 팔일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고 육일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는데, 지금 이 그림은 네 줄로 나뉘어 96명이 그려진 것은 『횡사비고(黌祀偹考)』의 「십이도(十二圖)」를 참고하여 무용의 모습을 구비한 것이며, 정식 일수(佾數)를 따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그림에 그려진 96명의 무용수는 제도상 맞지 않는 것으로, 실제 문묘의 육일무는 춤추는 사람이 36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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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3대 명절 연회 경륭무악(慶隆舞樂)
『악지․악전(樂志․樂典)』9 수록
여곤초(余堃初) 편집, 총찬관(總纂官) 주원추(周爰諏) 수정 편집
청국사관본(清國史館本)
故史002514청나라 궁정의 다양한 연회 자리에서는 전통적으로 만주족 특색을 지닌 경륭무(慶隆舞)가 공연되었습니다. 이는 만주족의 망식무(蠎式舞, 또는 마극식무(瑪克式舞))에서 발전한 것으로, 건륭 8년(1743)에 경륭무로 다시 이름 지웠으며, 무무(武舞, 양열무(揚烈舞))와 문무(文舞, 희기무 (喜起舞))로 나뉩니다. 공연 때는 양열무를 앞세우고 희기무가 뒤따릅니다. 『청사고·예지(清史稿·禮志)』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향의 예절은 이전과 같으나, 술잔을 돌린 후에는 경륭무가 시작되며 사장(司章)이 노래를 부르고, 사무(司舞)는 가면을 쓰고 우마(禺馬, 우마는 허리에 두르는 가짜 말로, 마치 죽마를 탄 것과 같음)를 타고 나와 양열무를 춘다. 사현(司絃), 쟁(箏), 완(阮), 절(節), 변자(抃者)가 차례로 연주를 시작한다. 희기무가 이어지면 대신들이 입장하여 삼고례를 행하고, 노랫소리에 맞춰 대열을 따라 춤을 춘다. 노래가 끝나면 가(笳)를 불고 번부(番部)의 합주가 이어지며, 내무부 관리가 조선의 패(俳)를 인도하고 회부(回部)와 금천(金川) 출신 어린 시동들이 백희(百戲)를 공연하니 그 점이 이전과 다를 뿐이다.”
‘황제의 3대 명절 연회 경륭무악(慶隆舞樂)’에는 정해진 악기와 편성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사용된 악기는 비파(琵琶) 8, 삼현(三絃) 8, 해금(奚琴) 1, 쟁(箏) 1, 절(節) 16, 박(拍) 16, 그리고 변(抃, 손뼉을 침) 16사람으로 구성되며, 연주자는 모두 석청색 바탕에 금색 ‘수(壽)’ 자가 수 놓인 도포에 표범가죽 외투를 착용하였습니다. 양열무에는 16명이 황색 천 덮개, 16명이 흑 양피 덮개를 입고, 모두 가면을 착용하였습니다. 희기무는 대신 18명이 출연하며 모두 조복(朝服)을 착용하였습니다. -
양열무(揚烈舞), 희기무도(喜起舞圖)
『흠정대청회전도(欽定大清會典圖)』권 56에 수록
곤강(崑岡) 등이 칙명을 받아서 지음
청 광서 25년(1899)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석인본
贈善037067청 광서 25년(1899)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간행한 석인본『흠정대청회전도(欽定大清會典圖)』권56에는 「경륭무악무도(慶隆舞樂舞圖)」, 「양열무악무도(揚烈舞樂舞圖)」, 「희기무대무도(喜起舞隊舞圖)」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도판에는 가짜 말을 탄 무용수와 검은 가죽옷을 입은 인물들로 구성된 음악무용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높은 죽마를 타고 활을 쏘는 장면, 절(節)을 들고 노래하는 자세도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