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의 임무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공주에게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에 가깝습니다. 인류 역사상 자유로운 사랑이 아니라 개인, 가족,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략적인 결혼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지리적, 인적 구조를 갖고 있던 청나라 역시 이를 통치방식의 하나로 활용했습니다.
이 전략에 따라 청나라 공주들은 12세에서 20세 사이에 시집을 가고, 그녀들의 청춘과 일생을 바쳐 제국의 안정적인 운영과 정치적 동맹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역사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제국의 여성 조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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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화정(固倫和靜)공주 혼례를 기록한 시
《어제시삼집(御製詩三集)》에 수록됨
청 고종(高宗) 지음
청 건륭연간에 쓰여진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고고(故庫)0310271770년 건륭(乾隆) 황제의 일곱째 딸인 고륜화정 공주는 몽고의 라왕둬얼치(拉旺多爾濟, Lavan Dorji)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건륭황제는 시를 써서 이 일을 기록하고 공주가 부마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고 교만하지 않도록 타이르고 있습니다. 동시에 건륭 황제는 시에서 청나라의 정략결혼은 과거 중국의 「화친(和親)」과 다르게 주변 각 부가 모두 와서 청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청나라는 그들과 「가족」과「신하와 노복」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정략결혼 정책이 만주인 통치자에게 제국의 중심을 확고히 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성과 특수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주들의 인생은 이렇게 제국 정치의 운영과 아주 밀접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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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번(外藩) 몽고 할하족 사이인눠옌부(賽因諾顏部) 왕공 처링(策凌) 열전
청 국사관(國史館) 편집
약 18세기 후반
고전(故傳)00814416세기 후반부터 누르하치(Nurgaci)는 몽고인들의 세력을 끌어 들여 여진의 부족들과 명나라와 맞서고자 하였는데 정략결혼은 쌍방이 관계를 맺는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청나라 공주들의 부마는 몽고인이 가장 많았습니다, 할하(Khalkha)몽고인 처링( Ts'ering)은 1706년 강희 황제의 열 번째 딸인 석순각(碩純愨) 공주와 결혼을 하는데 청나라의 신뢰를 받았던 몽고인 부마의 한 사람입니다. 그의 재능은 청나라의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청나라는 그를 통해 할하 몽고를 제어하고자 그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사이인눠옌한부(賽因諾顏汗部, Sain Noyon Khan)를 이끌도록 하고 청나라가 사막 북쪽 지역을 제어하는 새로운 세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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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륭안(福隆安)열전
《합세둔등열전(哈世屯等列傳)》에 수록됨
이경겸(李景濂李景濂)이 초고 작성, 춘기선(椿祺繕)이 씀
20세기 전기 청사관(清史館) 원고
고전(故傳)007303만주인은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중시하는 혼인을 하였으며 귀족들 사이에 혼인 관계를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의 지위와 이익을 공고하게 하였습니다. 아이신줴뤄(愛新覺羅) 황족은 속칭 「여덟 개의 가문」이라고 부르는 과얼쟈(瓜爾佳, Gūwalgiya)씨, 뉴후루(鈕祜祿, Niohuru)씨, 타타라(他塔喇, Tatara)씨 등의 귀족과 통혼을 하였습니다. 적어도 23명의 황녀는 만주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들의 부마와 가족은 많은 경우 황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18세기 건륭(乾隆) 황제 때의 푸차(富察, Fuca)씨 부항(傅恒) 집안, 뉴후루씨와 화신(和珅) 집안은 대표적인 예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부항의 둘째 아들 복륭안의 전기로 내용은 그가 1760년 건륭 황제의 넷째 딸 화석화가(和碩和嘉) 공주와 결혼하고 요직을 거치며 운세가 대단했던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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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康熙)황제가 오응웅(吳應熊)과 그 아들을 처형한 기록
《역신전(逆臣傳)》에 수록됨
청 국사관(國史館) 편집
19세기 도성(都城) 유리창(琉璃廠) 반송거사(半松居士)가 식자한 간행본
고전(故傳)007658청 초기 조정에서는 오삼계(吳三桂)등 한인(漢人) 협력자를 번왕(藩王)에 책봉하고 뒤이어서 삼번(三藩)과 정략결혼을 통해 자기편으로 만들어 한인을 이용하여 남방의 반청 세력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한인 부마를 수도에 거주하게 하여 각지의 번왕을 견제하였습니다.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은 1653년 황타이지의 14녀(훗날 건녕(建寧) 또는 각순공주(恪純公主))와 결혼하고 장남 오세림(吳世霖)을 비롯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이 《역신전》의 기록은 1674년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킨 후 오응웅과 오세림이 강희황제의 명령으로 처형이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마와 아이를 잃은 공주는 그 후 잘 살지 못했습니다. 무협소설인 《녹정기(鹿鼎記)》에서 그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녕공주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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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은덕(豐紳殷德)이 공주를 독살하려 했다고 고발된 기록
「풍신은덕열전(豐紳殷德列傳)」에 수록됨
19세기 후기 청 국사관(國史館) 원고
고전(故傳)0110981789년 건륭(乾隆)황제의 열째 딸인 고륜화효(固倫和孝)공주는 권력이 있는 신하 화신(和珅, Hešen)의 큰 아들 풍신은덕에게 시집을 갑니다. 1803년 어떤 사람이 조정에 풍신은덕의 4가지 죄상에 대해 고발하였는데 그 중에는 공주의 식사에 독을 넣었다는 내용 등이 있었습니다. 이 필사본 열전의 원고에는 이 논란이 장장 네 장에 걸쳐 쓰여 그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공주를 해치려고 한 사건은 공식적으로 무고한 것으로 최종적인 결론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경(嘉慶)황제에 의해 처형되고 풍신은덕은 가경황제의 여동생인 화효공주를 대할 때 말 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고발사건은 아마도 정부 문헌 속에 명백하게 기록하지는 않는 일, 즉 정략결혼을 한 부부의 불안정한 관계와 난처함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