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상자를 열다
공주는 비록 전통적인 여성이지만 황실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재산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재산은 금전을 포함한 각종 동산과 부동산 등으로 황실의 계획과 분배에 따른 것입니다. 이 재산은 주로 공주의 일상생활과 소비에 쓰이는 것들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제국의 제도와 전통적인 만주인 여성의 생활 문화 그리고 공주로서 지위를 상징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
도광(道光)황제 다섯째 딸 수장화석(壽臧和碩) 공주상
19세기
비단에 채색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 아시아 예술박물관 (National Museum of Asi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소장그림 속의 인물은 청나라의 공주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도광(道光)황제의 다섯째 딸 수장화석 공주라는 설과 여섯째 딸인 수은고륜(壽恩固倫) 공주라고 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청나라 공주의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예는 상당히 적은데 이것은 그 진귀한 그림들 중의 한 폭입니다. 이 밖에도 청나라 공주가 역사 속에 관련된 정보를 남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이 그림은 사실을 기록하는 초상화의 특성에 따라 보기 드물게 한 공주의 얼굴과 자태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복장과 장식품 모양 등 각종 세부는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 전통 문화와 관련된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습니다.
-
고륜(固倫)공주 혼수 상자 목록
《내무부현행칙례(內務府現行則例)》에 수록됨
내무부(內務府) 편집
약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기 필사본
고관(故官)008506공주의 혼수품 내용은 청초에는 정해진 제도가 없었으나 훗날 건륭(乾隆)황제가 산정한 하나의 표준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건륭10년12월(1745년말에서 1746년초 사이) 상서를 올린 고륜공주의 혼수품 목록으로 내용은 상세하게 300종에 달하는 물품의 명칭과 수량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혼수의 종류는 복식, 장식품, 금은제품, 각종 생활용품, 직물, 가축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청나라 고륜공주의 풍부했던 혼수품 품목을 보여줍니다. 또한 여기에는 부마와 공주의 유모 등 관련된 사람들의 용품도 함께 열거되어 있습니다.
공주의 혼수품은 공주에게 앞으로 사용할 부분적인 생활물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청나라 황실의 위엄과 존엄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물품은 공주를 중심으로 계획되고 만들어진 것으로 그 안의 각종 품목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만주 귀족 여성의 물질과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금에 청금석(青金石)을 박아 넣은 금약(金約)
약 18세기
고잡(故雜)005977만주여성은 이마 위에 둥그런 테두리를 써서 장식을 하였는데 만주어로는 gidakū, 중국어로는 「압빈(壓鬢)」、「두고(頭箍)」、「액고(額箍)」、「발고(髮箍)」등의 명칭이 있습니다. 이것은 청나라 귀족 여성의 정식 관복에 포함된 머리에 쓰는 장식으로 이름은 「금약」입니다. 고륜공주의 혼수 목록에는 「동주(東珠) 열개를 박은 금고(金箍) 하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약으로 10장의 금과 10개의 동주가 달려있으며 1819년 내무부(內務府)에서 회수한 것으로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렇게 10개의 진주가 달린 수준의 금약은 아마도 고륜공주의 혼수품 목록에 열거된 예와 같은 형식일 것입니다.
-
비취옥 조주(朝珠) 목걸이
청
고옥(故玉)009580고륜공주의 혼수품 목록 중에 「진주 염주」, 「최생석(催生石)(주: 즉 청금석(青金石))염주」.「녹석(綠石) 염주」,「산호 염주」,「호박(琥珀) 염주」 등 5가지 서로 다른 재질의 염주가 각각 두 개씩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중 소위 「녹석(綠石) 염주」라는 것은 아마도 이 유물과 같은 비취옥(휘옥(輝玉))구슬을 위주로 한 조주와 비슷한 것일 것입니다.
조주는 옥을 주요한 재료로 한 예가 많지 않은데 비취옥은 더욱 보기 드뭅니다. 동치(同治)시기 비취옥으로 된 장신구가 점차 늘어나는데 이 조주는 한편으로는 19세기 비취옥의 유행에 호응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주가 걸치는 조주의 재질이 더욱 다양해진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1727년(청 옹정(雍正) 5년)사공주(四公主) 덕정비(德政碑)의 기록
《신수청수하청지(新修清水河廳志)》에 수록됨
아극달춘(阿克達春) 등이 편찬
1883년
국방부 기증
증선(贈善)0219821697년 강희(康熙)황제의 여섯째 딸이 할하족 몽고 투셰투한부(土謝圖汗部, Tüsheet Khan)의 둔둬부둬얼치(敦多布多爾濟, Dondob Dorji)에게 시집을 간 후 칭수이허(清水河, 오늘날 몽고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칭수이허(清水河)현 경내)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게 되었습니다. 1727년 공주의 토지로 이주해 와 개간을 한 사람들이 여러 개의 「공주덕정비(公主德政碑)」를 세워 공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청수이허 지역에 18세기 초 지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이주해 와 개간을 한 사람들과 원래 해당 지역에 살던 투메드(Tümed) 몽고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는데 이러한 덕정비를 세워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공주의 위엄과 명망 뿐만 아니라 이주해 온 사람들의 개간의 합법성이기도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