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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딸

중국어에서 「공주(公主)」라는 말은 적어도 중국에서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전국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이는 본래 군주나 제후의 딸을 지칭하는 것으로 훗날 황제의 딸에 한해 부르는 이름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한국, 월남에서도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16세기 후기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이들 여성들은 황제의 딸로서 귀하고 평범하지 않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으로 사실상 우리와 같이 자신만의 성장과 생활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전시의 시작은 먼저 이들 특별한 여성들이 어떻게 공주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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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표(公主表)

    청사관(清史館) 편찬
    20세기 초기 청사고(清史稿) 초고
    고사(故史)006345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청사고(清史稿)》원고의 하나로 95명의 청나라 공주들에 대한 자료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문서에는 8개의 난이 있는데 그 중 「이름」난에는 공주의 본명이나 별호를 적어 넣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앞에 있는 태종(太宗, 홍타이지)의 8명의 공주는 자료를 기입해 넣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빈칸으로 남겨져 자료가 가장 적은 난입니다.

    만주 여성은 원래 자기의 이름이 있었는데 중국을 통치하게 된 후 아마도 한인들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이름을 점점 강조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황태자가 대부분 자신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것과 달리 황녀의 이름은 문헌 속에 찾아보기 힘들고, 기껏해야 「황제의 몇 번째 딸」 혹은 「몇 번째 공주」와 같은 태어난 순서와 제국에서 부여한 칭호 정도만 남았으며 제국의 대외 관계와 밀접했던 그녀들 인생의 직책과 호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1641년 공주 아투(阿圖)의 부마가 예물을 보낸 기록

    《대청태종문황제실록(大清太宗文皇帝實錄)》에 수록됨
    진명하(陳名夏) 등이 명을 받들어 편찬(1655처음 편찬) 악이태(鄂爾泰) 등이 명을 받들어 수정(1740년초 수정 편찬)
    한문(漢文) 소홍릉본(小紅綾本), 건륭(乾隆)연간 수정 편찬본
    고관(故官)001680、고관(故官)001633

     

    홍타이지의 다섯째 딸 아투는 후세에 주로 「고륜숙혜장 공주(固倫淑慧長公主)」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최초 편찬 판본에는 1641년 아투 공주가 혼인을 하기 전, 부마인 숴얼하(索爾哈, Suo'erha)가 신부에 예물을 보내는 과정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에 드물게 공주의 본명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건륭(乾隆)연간에 수정되어 편찬된 판본에는 아투의 본명이 삭제되고 「다섯 번째 딸 고륜(固倫)공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간본은 주로 초기 만주어 원본 당안에서 비롯되어 번역이 된 것으로 그 안에 많은 만주 여성의 본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투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만주인들이 중국을 통치하게 된 이후 여성의 본명은 더 이상 강조되지 않았으며 아투의 이름도 의도적으로 수정이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록》의 판본과 작성 방법은 만주 문화와 그 전통적인 여성 지위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금대야

    전귀비(全貴妃) 뉴후루(鈕祜祿)씨 명으로 제작
    1831년
    고잡(故雜)001933

     

    1831년에 전귀비(全貴妃) 뉴후루씨(Niohuru,함풍(咸豐) 황제 혁저(奕詝)의 생모, 훗날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의 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함풍황제의 서술에 의하면 그가 1831년 태어났을 때 이 대야를 쓴 적이 있다고 합니다. 1840년 뉴후루씨가 세상을 뜬 후에 도광(道光)황제는 어명을 내려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앞으로 황자, 황손, 증손, 원손과 공주와 거거(格格) 등 남녀 신생아는 모두 내전 총관이 칙명을 주청하여 이 대야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황녀가 이 대야를 정말로 사용하였을까요? 현재로서는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린 황녀는 모두 사람들의 축복과 찬송 아래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금 대야는 그녀들의 인생에서 첫 번째로 받는 예우로써 여기서부터 그들의 황실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내칙연의(內則衍義)

    부의점(傅以漸) 등이 지음
    1656년(청 순치(順治)13년)내부(內府) 간행본
    고전(故殿)018261

     

    황녀는 궁중에서 자라게 되는데 취학연령이 되면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황자가 완전한 교육 체계와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달리, 황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문헌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에는 매우 한계가 있습니다. 《내칙연의》는 여러 편의 공주와 관계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독자는 황녀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고 때문에 황녀의 독서와 학습에 관한 간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황녀는 황실의 구성원으로 미래의 제국의 외부와의 정략결혼이라는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내칙연의》의 내용은 제국에 이바지하는 책임을 위해 교육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마도 이는 궁중에서 황녀를 교육하는 원칙과 기대의 일부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공주 혼례 보화전(保和殿) 연회 자리순서

    《흠정대청회전도(欽定大清會典圖)》에 수록됨
    탁진(托津)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 간행
    1813년(청 가경(嘉慶) 18년)무영전(武英殿) 간행본
    고전(故殿)012959、012960

     

    이것은 공주가 결혼하는 혼례 당일 자금성 보화전에서 거행된 연회의 좌석배치도입니다. 황제의 자리는 궁전 중앙의 「보좌(寶座)」에 위치하고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4줄의 연회석이 있는데 모든 왕공과 대신은 동쪽 좌석에,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과 부마의 가족은 서쪽 좌석에 앉았습니다. 이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부마와 남성 친인척들을 대접하는 활동으로 주제는 비록 「공주의 혼례」이지만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으로 공주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연회의 자리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었으며 정해진 규범에 따라 예를 행하는 궁정의 의식과 그 음악을 보면 공주의 결혼이라는 임무를 위한 서막을 천천히 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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