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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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미우인 구름 덮인 산에서 뜻을 이루다
미우인(米友仁, 1 0 7 4 - 1 1 5 1)은 미불(米芾, 1 0 5 1 - 1107)의 큰아들로 집안의 학풍을 계승하여 서화에 능하고 감상에 정통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 봉우리들과 산속의 안개, 구름바다, 집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산봉우리와 나뭇가지의 끝과 지붕만 그리고 바닥을 그리지 않아 마치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경관을 표현하였습니다. 두루마리 뒤쪽으로 미우인이 직접 쓴 제발이 있는데 이 작품은 1135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혹자는 이 그림과 미우인의 제발이 모두 모사본이라고 하는데 상하이박물관이 소장한 <소상도(瀟湘圖)>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원나라때 구름에 덮인 산 그림이 송별,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은거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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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전선 왕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영산도(瀛山圖)
이 작품의 화면 왼쪽 절반은 끝없이 이어진 산과 골짜기, 산촌의 초가집을 그렸고 오른쪽으로는 한없이 넓고 아득한 큰 강에 작은 배들을 작은 점처럼 그렸습니다. 넓고 광활한 강물과 웅장하고 험준한 산세가 대비를 이루고 있어 구도에서 두루마리 그림과 파노라마식 경치의 매력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1064년이라는 서명은 왕선(王詵, 약1048-1122)의 생애와 일치하지 않으며 화풍도 왕선과는 다르고 오히려 전선(錢選, 1239-약1301)에 가깝습니다. 제발이 있는 종이 위의 「장(長)」자 반쪽 도장은 본원이 소장한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송풍각(松風閣) 시〉와 동일하여 어쩌면 전선이 초년에 가사도(賈似道, 1213-1275)를 위해 그린 모본일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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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금현 고극공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구름 덮인 산봉우리와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이 작품은 가로로 된 점으로 산과 바위의 질감과 입체감을 표현하는 준법(皴法)을 대신한 산수화 족자로 크기는 작지만 큰 산의 기세가 당당하며 확실히 고극공(高克恭, 1248-1310)의 양식적 특징이 있으나 서명이 다릅니다. 그림 전체에 형식적인 「미점(米點)」을 사용하였고 Z자 형의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높지 않은 낮은 수풀이나 서재, 작은 길, 작은 다리 등이 어우러지고 있는데 이는 강남 문인화에서 사랑을 받았던 소재들로 명대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아마도 금현(金鉉, 1403-1424에 활동)이 그리고 시를 지어 넣은 것에 다른 사람이 가짜 서명을 더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현의 자는 문정(文鼎)으로 화정(華亭)사람인데 고극공과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산수화를 모방하여 한때 유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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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당인 금창(金閶) 송별도
당인(唐寅, 1470-1524)은 쑤저우(蘇州) 사람으로 자는 백호(伯虎)이고 호는 육여(六如)로 1498년 난징(南京)에서 치러진 향시(鄉試)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명나라 회화 4대 거장의 한 사람입니다.
이 작품은 쑤저우의 선비들이 지부(知府)*였던 정저치(鄭儲豸, 약15세기)를 송별하는 그림입니다. 두루마리의 앞부분에는 서리로 뒤덮인 숲이 그려져 있으며, 배경에는 성문 위의 누각과 성문, 멀리 있는 탑이 엿보이고 성밖에 높이 솟은 다리 아래에는 배가 있고 다리 위를 지나가는 행인들이 있습니다. 물가에는 부두까지 관리들과 평민들이 함께 늘어서서 슬퍼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고개를 돌아 선비들에게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인사하는 사람은 정저치입니다. 작품 전체에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주신(周臣, 약1450-1535)의 양식이 융합되어 있고 붓질은 거칠어 보이지만 선은 오히려 우아하고 힘이 있으며 깔끔합니다. 때문에 왕치등(王穉登, 1535-1612)은 발문에서 「붓질이 자유롭고 그 뜻은 초월적이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지방관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