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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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작자미상 주티군에서 만들어진 물고기와 해오라기 문양 와당
와당(瓦當)은 전통 건축의 지붕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 대략 전국시대에 시작이 되었으며 기와를 막고 처마끝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였습니다. 한나라때 와당의 표면은 여러가지 문양과 문자로 장식되어 있는데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하며 역사적 정보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엽공초(葉公超)선생이 기증하신 것으로 동한시대 주티군(朱提郡, 오늘날 윈난(雲南)성 자오퉁(昭通)시)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의 탁본입니다. 서기100년으로 기록된 전서로 쓰여진 명문이 가운데 있고 양쪽에 물고기와 해오라기 문양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현지에서 만들어진 구리 기물과 매우 비슷하여 지극히 지방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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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작자미상 조관 비석
이 작품은 좡인(莊因), 좡저(莊喆), 좡링(莊靈)선생께서 기증한 탁본으로 원래의 비석은 1941년 칭하이(青海)성 러두(樂都)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180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인 조관(趙寬, 88-152)은 하오먼(浩門)현 현장(縣長)으로 특별히 초빙된 「세 명의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 지방교육을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손자 조황(趙璜, 2세기에 활동)이 집안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 비석을 세웠기 때문에 비석에는 조상의 계보와 공덕이 서술되어 있고 조관이 교육에 헌신했던 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예서로 쓰여 졌는데 글자 모양은 단정하고 선은 각이 많이 지며 서예 양식적으로는 165년에 제작된 <화산비(華山碑)>와 175년에 만들어진 <희평석경(熹平石經)>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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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육간지 문부(文賦)*
육간지(陸柬之, 7세기 중기에 활동)에 대해 역사에는 그가 외삼촌인 우세남(虞世南, 558-638)과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행서와 초서를 모방했으나 독창적인 양식은 부족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에 쓰여진 내용은 9세기에 편찬된 《문경비부론(文鏡秘府論)》에 수록된 것과 대체로 비슷하며 이체자(異體字)와 피휘(避諱)**방식이 당나라때 자료와 많은 부분이 호응을 하고 있어 이 작품은 <문부>의 오래된 필사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행서를 위주로 하고 있고 사이사이 초서가 쓰였는데 양식적으로 <난정서(蘭亭序)>와 상당히 비슷하며 이러한 특징은 사료에서 육간지의 서예에 대해 기재한 내용에 부합합니다. 때문에 원대 이래 육간지의 서예라고 전해져 왔습니다.
*중국 운문체(韻文體)의 하나.
**국왕, 조상, 성인이 쓰는 이름, 국호, 연호와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음. 또는 그러한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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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위종식 사마광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로 임명하는 고신
「고신(告身)」이라는 것은 옛날에 정부에서 관직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증서입니다. 품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형식에 각각 달랐습니다. 이 작품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1086년에 재상의 벼슬에 임명되었던 고신입니다.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본문을 작성하고 다시 문하성(門下省) 관원들의 검토를 거쳐 황제의 「승인」을 받고 상서성(尚書省)관원들의 서명을 받아 이부(吏部)에서 직인을 받는 등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5급이상의 관리를 임명하는 「제수(制授)」의 고신으로 3급이상의 관리를 임명하는 「책수(冊授)」의식을 대신하여 재상을 임명하는 것으로 북송정부에서 1082년에 관직제도를 개혁한 정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큰 글자의 행서가 많은데 붓놀림이 유려하고 구성이 치밀하며, 꼿꼿하고 펼쳐지는 듯한 기운을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의례에 따라 이부 영사(令史)인 위종식(魏宗式, 11세기에 활동)등의 사람들이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의 관직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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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의 자는 여필(汝弼)이고 호는 동해(東海)로, 오늘날 상하이(上海) 사람으로 명대 운간서파(雲間書派)의 대표적인 서예가입니다. 이 작품은 모두 그의 나이 61세와 62세 사이에 친한 친구인 사마인(司馬垔, 1439-1484이후)에게 쓴 편지와 시입니다. 전체적으로 행초(行草)서체와 광초(狂草)서체를 위주로 장초(章草)서체의 필법이 섞여 있습니다. 글자의 크기와 글자 모양의 길이, 선의 굵기의 대비가 매우 강합니다. 이 작품은 선의 시작과 끝을 깔끔하게 표현하거나 꺾이는 곳에서 절묘한 붓질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대담하고 구속되지 않는 붓놀림과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들오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궁중의 「관각체(館閣體)」와는 대조되는 탐미적인 서예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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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작자미상 조맹부가 썼다고 전해지는 소식의 고시(古詩)*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자는 자앙(子昂)이고 호는 송설(松雪), 구파(鷗波) 등으로 원대이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인 서예가이자 감정가의 한 사람입니다. 본 작품은 소식(蘇軾)의 시 <승려 잠견(潛見)이 증정한 시 구절을 따서 짓다>를 쓴 것으로 붓놀림이 멋스러우면서 매끄럽고, 선이 강하고 굳세며 한치의 망설임이 없습니다. 글자의 필획의 구성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오른쪽 위쪽이 비스듬히 들어올려져 있는데 확실히 조맹부가 말년에 이옹(李邕, 678-747)의 서예를 배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법과 필획 구조의 변화는 크지가 않은데 예를 들어 붓질을 시작할 때와 글자의 오른쪽 위쪽은 네모진 붓질을 많이 사용하고 세로 갈고리와 「수(水)」,「불(不)」등 글자의 모양이 중복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건륭황제의 제발에서 언급한 내용은 맞는 것으로 이 작품과 쓰여진 제발은 모두 명대의 「훌륭한 위조품」 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