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개
작가
미불(米芾, 1051-1108) 은 서화에 능하고 감상에 정통했던 북송 사대 서예가의 한 사람입니다. 그의 서예는 「옛 글자를 한데 모았다」라고 칭송되는데 그가 많은 옛 대가들의 서예와 양식을 터득하고 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내용
1092년 초여름, 미불은 다시 관직을 얻어 옹구(雍丘, 오늘날 하남성 기현(杞縣)) 현령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관련 연구에서는 이 작품은 아마도 그가 현령에 부임한 후 이순(李錞, 1059-1109, 자(字)는 희성(希聲))에게 쓴 편지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상대방에게 안부인사를 하고 있는데 대략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내가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어 그대와 먼 거리에 있지 않음에도 만나서 인사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 그대가 두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대가 웃으며 흥을 돋우라고 작은 시 한 수를 보냅니다. 후반부에는 시를 썼는데 그 대략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내 몸의 앞과 뒤에 대나무와 느티나무가 있어 오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어 예전에 신선이 사는 산이나 꿈에 본 경치와 같은 아름다운 곳을 자주 오고 갔던 생각이 나고, 마음 속에서는 우아한 모임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친구 사이의 우정 어린 분위기가 몸과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서예
격식과 구성
일반적으로 말해 내용과 격식이 가장 완전한 송대 척독은 최소한 올림이나 드림과 같은 높임말, 호칭, 용건, 서명 등 9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척독에서는 인사치레의 말을 쓰지 않는데 이 작품은 인삿말와 용건 그리고 완전하지 않은 서명 밖에 없지만 어색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밖에 송나라 사람들이 척독에 시를 쓰고자 할 때는 글을 시작하는 위치가 용건보다 높았습니다. 예를 들면 본원의 소장품인 〈이종악(李宗諤)이 사룡(士龍)에게 쓴 시〉,〈소식(蘇軾)이 변재(辯才)법사의 시 구절을 따서 지은 시〉,〈소식이 황제를 알현하게 될 세 분의 사인(舍人)의 시에서 구절을 따서 지은 시〉 그리고 미불의 〈제거통직사(提舉通直使)에게 보내는 시〉, 〈재미삼아 써서 사련(司諫) 앞에 바침〉이 있습니다. 때문에 〈나의 좋은 벗 희성에게 보내는 척독〉도 동일한 격식을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복원도를 만들어 보면 미불이 쓴 이 세 줄의 시 구절의 구성은 비교적 긴밀하고 글자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이 꽤 자유분방하여 본문이 단정하고 시원시원 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작은 시」의 흥을 돋우는 분위기와도 잘 맞습니다.
전승과 장황
오늘날 보았을 때 이 작품의 1-4줄 사이에는 잘린 흔적이 없으며 5-9줄에는 가로와 세로로 이어 붙인 흔적이 있어 이전에 새롭게 장황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붙인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領華)」는 원래 「호(壺) 」자의 아래에 있었고, 「욕위십(欲為十)」은 원래 「흥(興)」자의 아래에 있었으며 「사일신한(使一身閑)」은 원래 「단(端)」자의 아래에 있었고 「한(閑)」 아래에는 종이가 남겨진 여백이 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의 1-4줄을 기준으로 하고 기타 송대 척독에 시를 적는 구성을 참고해서 복원을 해보고자 한다면 이 작품의 원래 크기는 아마도 대략 길이 32센티미터, 너비 27센티미터였을 것입니다. 이밖에 「한(閑)」아래의 종이가 남겨진 여백과 다른 종이가 이어진 곳에는 〈선우추백기부(鮮于樞伯幾父)〉라는 간인(間印)이 찍혀져 있어 이 작품이 늦어도 선우추(鮮于樞, 1246-1302)의 시대에는 이미 새롭게 장황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우추가 1284년에 본원이 소장한〈당 안진경(顏真卿)이 조카를 위해 쓴 제문 원고〉를 다시 장황했던 사실로 보았을 때 어쩌면 그가 다시 이를 이어 붙인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짧은 편지, 편지를 보통 길이 한 자쯤 되는 종이에 썼음으로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