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전란 속에서의 굴원
굴원이 살았던 시대는 전국의 세력 구도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중요한 전환기에 해당합니다. 초기의 초나라는 국력이 강성하여 남방의 강한(江漢) 유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증희호(曾姬壺)〉에 나타난 초나라와 증나라의 혼인 동맹 배경을 통해 당시 초나라가 외교와 혼인을 통해 견고한 관계망을 구축하며 대국으로서의 정치적 역량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앙(商鞅)의 변법 이후 진나라가 급속히 부상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초나라 회왕(懷王)과 양왕(襄王)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초나라는 심각한 내우외환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부적으로는 조정이 파벌 간의 대립과 정책 결정의 분열에 깊이 빠져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진나라의 거센 공세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초나라의 중책을 맡은 신하인 굴원은 이러한 격동의 정세 속에 놓여 있었으며 그의 삶의 경험은 국세가 기울어 가는 상황에서 개인이 마주해야 했던 어려운 선택을 보여줍니다. 이 주제에서는 내정과 외교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초나라가 강성에서 쇠퇴로 나아가던 시대의 윤곽을 그려 보고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원이 보여준 삶의 태도를 함께 살펴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투쟁
기원전 313년,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 생년 미상–기원전 309)는 초나라로 가서 ‘상어(商於)의 땅 육백 리’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미끼로 삼아 초 회왕(생년 미상–기원전 296)으로 하여금 제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나라가 전략적으로 고립 상태에 빠지자 진 혜문왕(기원전 356–기원전 311)은 곧바로 약속을 저버렸고 이에 분노한 초 회왕은 군사를 일으켰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외교적 속임수는 초나라의 대외적 명성과 명예를 크게 훼손하였으며 당시 제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던 굴원(屈原)은 또한 이 일로 인해 조정에서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굴원의 정치적 생애는 초나라 회왕과 양왕 두 대에 걸쳐 이어지며 진나라와 초나라의 관계가 동맹에서 결렬로 나아가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이 글 〈저초문(詛楚文)〉은 진나라 왕이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통해 초나라가 맹약을 저버리고 내정에서 덕을 잃었다고 꾸짖는 공문서입니다. 그 구체적인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으나 당시 강대국 간의 치열한 정치적 경쟁과 외교적 갈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저명한 학자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은 이 문서가 진 혜문왕이 초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 두 나라의 영토 확대와 감소는 이 패권 경쟁의 참혹한 양상을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초나라가 크고 진나라가 작았으나 회왕 시기에는 무(巫)와 검중(黔中) 지역을 상실하였고 양왕 시기에는 수도인 영도(郢都)마저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 생년 미상–기원전 257)에게 함락되어 부득이하게 천도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진나라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초나라의 문화
강가와 못가를 거닐며 시를 읊는 굴원(屈原)의 모습
유배된 이후 그는 “강가와 못가를 거닐며 호수가에서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며 그때의 초췌한 얼굴과 수척해진 모습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해석되어 온 비할 데 없이 높은 격조를 지닌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부와의 대화 속에서 “세속의 먼지와 때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고결함을 드러내며 자신의 좌절을 이상에 굴하지 않는 굳은 의지로 승화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적 감화력은 후세의 명사들로 하여금 “통쾌하게 술을 마시고 〈이소〉를 깊이 읽을” 때 단순히 고전을 읽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공명과 정신적 의지처를 찾게 하였습니다.
-
진 무함조나(巫咸朝那) 저초문(詛楚文) 서첩
종이
故帖000042이 공문서는 기원전 4세기 말, 진 혜문왕(기원전 356–기원전 331)이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초나라가 맹약을 저버리고 덕을 잃었다고 꾸짖으며 진나라가 출병하는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발표한 정치적 성명입니다. 이 서첩은 비록 북송 시기의 〈강첩(絳帖)〉을 다시 새긴 번각본이지만 강대국 간의 승패를 걸고 겨루는 역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문자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그 글자의 모양은 진나라 전서(篆書)보다 더 네모지고 필획은 가늘고 뾰족하며 꺾임이 뚜렷하여 갑골문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글자는 주나라 시대 금문을 계승하면서도 이후 소전(小篆)의 시작으로 이어져 전국시대 진나라 계통 문자가 금문에서 소전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
명 진홍수(陳洪綬) 굴원이 걸으며 시를 읊는 모습을 그린 그림
『초사(楚辭)』 명 숭정 11년 간행본
종이
贈善003924至003925화면 속에서 굴원이 높은 관을 쓰고 긴 칼을 찬 채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는 모습은, 〈구장(九章)·섭강(涉江)〉에 보이는 “긴 칼을 차고 그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며 관은 구름을 가를 듯 높이 우뚝 솟아 있다”는 표현과, 〈어부(漁父)〉에 나타난 “굴원이 이미 유배된 뒤 강과 못가를 거닐며 호수가에서 시를 읊었는데 얼굴빛이 초췌하고 모습이 몹시 수척하였다”는 특징을 함께 아우르고 있습니다.
책에 실린 열 두 폭의 삽화는 진홍수(1598–1652)의 작품으로 명대 출판 문화에서 글과 그림이 서로 어우러져 발전하였던 번성한 양상을 잘 보여 줍니다. 진홍수가 그린 굴원의 형상은 문학적 이미지를 정확하게 시각적으로 옮겨 낸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독창적인 시각적 양식으로 인해 후대에 널리 인정받는 고전적인 전형이 되었습니다.